필립 말루엥, 물성을 관찰하는 방식
필립 말루엥(Philippe Malouin)의 제품은 완성된 외형보다 그 외형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읽을 때 더 분명해진다. 그의 작업에는 가구와 조명, 설치를 가로지르는 공통된 태도가 있다. 재료를 먼저 움직이고 접고 연결해본 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구조를 실제 사용 가능한 물건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곡선형 소파 DS-707, 재활용 알루미늄 선반 T-Board,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테이블 조명 Bilboquet는 서로 다른 물성을 다룬다. 그러나 세 작업 모두 표면적인 장식보다 제작 방식과 사용 경험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DS-707 — 접는 행위에서 시작된 곡선
스위스 가구 브랜드 de Sede를 위한 DS-707은 몸체를 따라 이어지는 굵은 곡선이 특징인 모듈형 좌석이다. 초기 디자인 과정에서 말루엥은 폼을 접는 실험을 반복했다. 사각형 폼을 접고 다시 접는 간단한 조작이, 별도의 장식선 없이도 강한 윤곽을 만드는 출발점이 됐다.
이 소파의 조형성은 부드러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두툼한 볼륨과 선명한 굴곡이 함께 놓이면서 구조물처럼 단단한 인상과 앉는 가구의 편안함이 한 형태 안에 공존한다. 개별 모듈을 이어 공간에 맞게 확장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조각적인 실루엣을 일상적인 사용과 연결한다.
DS-707 for de Sede — Design: Philippe Malouin · Image credit: © Philippe Malouin / COTS Archive



T-Board — 재료의 단면이 곧 시스템
2024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Hydro가 선보인 ‘100R’ 프로젝트는 사용 후 회수된 알루미늄을 소재로 일곱 명의 디자이너가 물건을 설계하는 실험이었다. 말루엥이 제안한 T-Board는 압출 알루미늄 프로파일을 반복해 선반의 수평면과 지지 구조를 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활용 소재의 사용 자체보다 소재가 가진 가공 논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같은 단면을 반복하는 모듈 구조는 연결과 확장이 쉽고, L자형 브래킷은 각 부재를 지지하면서 전체 형태를 정리한다. 길이를 달리하거나 여러 단을 연결하면 선반은 하나의 제품에서 공간을 나누는 구조물로 확장된다.
재료의 출처와 가공 방식, 조립의 규칙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시각 언어로 삼았다는 점에서 T-Board는 산업 재료를 다루는 설계의 좋은 사례다.
T-Board, Hydro 100R (2024) — Design: Philippe Malouin · Image credit: © Philippe Malouin / COTS Archive





Bilboquet — 조명의 형태를 완성하는 사용자의 손
Flos와 함께 만든 Bilboquet는 두 개의 원통형 부분과 하나의 구형 연결부로 이루어진다. 자석식 연결 구조를 중심으로 헤드를 움직이면 빛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사용자가 조명기구를 다루는 움직임이 곧 제품의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는 셈이다.
구조가 간결하다고 해서 제작상의 선택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Flos에 따르면 본체에는 제지 공정의 부산물에서 유래한 폴리카보네이트가 사용되고, 조립에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아 분해와 재활용을 고려했다. 연결 방식과 재료 선택, 부품의 분리가 제품 사용 이후까지 이어지는 설계의 일부가 된다.
Bilboquet의 형태는 일종의 놀이기구처럼 직관적이다. 그러나 그 친숙함은 장식을 더해서 얻은 효과가 아니라, 조절 메커니즘을 눈에 보이는 중심 요소로 배치한 결과다.
Bilboquet for Flos — Design: Philippe Malouin · Image credit: © Philippe Malouin / COTS Archive



형태는 실험의 결과를 기억한다
DS-707에서는 접는 동작이 곡선을 만들고, T-Board에서는 압출된 단면이 모듈 시스템이 되며, Bilboquet에서는 결합부가 조작 방식을 결정한다. 디자인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스케치의 스타일이 아니라 재료와 제작의 조건이라는 점이 선명하다.
세 작업은 실험적 조형과 사용성을 양립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완성된 물건을 보고 ‘어떻게 이런 형태가 나왔을까’ 묻게 된다면, 그 질문은 이미 디자이너가 탐색한 공정과 재료의 성질을 향하고 있다. 말루엥의 작업에서는 그 흔적이 제품의 개성이 된다.